양수에서 빼는 일, 음수에 더하는 일. '회복'은 어느 쪽일까?

 

인생에서 겪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총량은 비슷할까?

마치 삶에도 저울이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그만 좀 재라는 말을 들었던 인간답다.- 오늘도 끊임없이 여러 개의 양팔저울이 내 옆에서 갸웃거린다. 아주 사소한 고민을 얹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저울들 수십 개가 모여 자그마한 숲을 이루는 게 일상이고, 또 가끔은 아파트를 세워 둔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저울이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한다. 그리곤 내가 만들었지만 마치 저가 나를 창조한 양 '이걸 고민하지 않으면 다른 건 없어!'라고 엄포를 놓고.

 

이전처럼 고민하는 것 자체를 고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때는 그랬었다. 나는 왜, 어느 것도 쉽사리 넘기질 못하고 이렇게 손에 쥐고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여기서 일상보다 스트레스가 조금 더해지면 그냥 좀 단순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럼 세상은 온통 아름다워보이겠지, 같은 속 편한 소리와 함께. 그냥 생각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아주 거대한 후폭풍을 (아직은 맞아본 적 없지만) 맞을 수도 있다는 무의식의 두려움이 항상 나를 깨우곤 했다. 특히 대학 입시를 지나고 학부 과정을 소화하면서는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뭔지 모르지만 미래의 내가 자꾸 채찍질하는 기분이었달까. 사실 아무도 주변에서 날 재촉하지는 않았었는데. 기업들의 취업 설명회를 쫓아다니고, 멘토링 프로그램을 듣고, 서울 모 컨설팅 업체에 상담을 받으러 가서는 이과생은 절대 아니라는 엉뚱한 결론을 얻어 오곤 했었다.

 

이제는 조금 받아들이는 편인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는 언젠가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거고, 다만 그 어느 순간을 위해 준비하면 좋을 것들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되지 않은 무언가가(보통 안 좋은 류의 일이겠지) 코앞에 닥친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아주 큰 일을 겪어서 내가 상처입더라도, 어떻게든 성장하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조금 자만한 믿음도 함께. 그 믿음이 지난 몇 달간 힘겨웠던 내가 다시 글을 적는 원동력이 되었다. 발행 예정 기간이었던 11월을 넘기고, 12월과 1월도 휩쓸려 지나가면서 어느 새 약속했던 발행 기간 한 회차가 넘어가버린 2월에 이 글들을 마감하면서 문득 그 생각을 다시 한다.

 

간단하게 사진 하나, 트윗 하나로도 생존 신고를 하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겠지만- 아직도 구식인 사람은 이렇게 드문드문 떠올리고, 적었다가 지우고 고치고를 거듭하는 짧은 꼭지 몇 개로만 생존 신고를 하는 법인가 보다. 폭풍같은 나날들이 지나는 와중에 때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자잘한 흔적이 간단한 연락 하나, 글자 한 줄로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어쩌면 어느 것은 극복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갔겠지. 거창한 바람일 수도 있겠으나 이 글을 적으면서, 또 읽으면서 누군가의 어느 무엇이라도 좋아지길 바란다. 아주 조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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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대충 중학생 즈음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간혹 놀라워하곤 한다. 어느 정도 그랬던 것 같기는 하나, 그들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라운 수준이다. 그 시절의 나는 뭐든 완벽해야만 하는 완벽주의자였으며, 내 의견과 맞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고집쟁이였다. 펼치는 의견은 강력하고, 어조는 따박따박했으며(이하 생략). 지금 생각해 보면 골이 아프다. 

 

올해, 아, 해가 바뀌어서 작년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에게 응답을 부탁했던 설문지가 있었다. 해달라고 조르고 패기롭게 들이밀 때는 언제고, 실은 한참 동안 열어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뭔가 두려웠달까. 무기명이라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들여다 본 사람들일 텐데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뭐라고 코멘트를 남겼을 지 전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생각보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 이 꼭지를 적기 전 답안지를 몰아서 살펴 보았다. 와, 무서운데 재밌어.

 

가장 놀라웠던 점은 모두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어찌 됐건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다는 거고, 그럼 그게 내 본질과 가까울 확률이 매우 높다는 얘기겠지. 모두가 아마 그렇겠지만 내게도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들이 있고, 이렇게 보이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아마 이 설문에 응답했을 분들에게 보이는 나는 이상적인 모습인 척 하기보다 제정신을 잃고 떠들어댔을 확률이 높았다. 언제부터였지,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입이 트이기 시작해서는 지금까지도 조용히 하질 못하니까.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더더욱.

 

나는 어영부영, 되는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보이는 모습은 딱히 그렇진 않았던 것 같아 새로웠다. 다만 뭘 하든 지구 끝을 파버리겠다는() 느낌이었던 건지..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체력도 근성도 부족하다. 예전에야 그랬을 지는 몰라도 지금은... 겨우 하던 취미생활이나 계속하고. 아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 다시 돌아가고.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이미 충분히 타성에 젖은 것 같은데. 요즘은 최대한 그러지 말아야지,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같은 생각은 계속 하는 것 같다. 하루이틀은 매우 길지만 몇 달은 어느 새 지나가버리는 무시무시한 일상의 권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장단점, 매력, 20년 후 미래 등등의 어렵고 불편할 수 있었던 세부 항목들에 친절하게 답해준 분들께 이 꼭지에서 다 함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비록 인터넷으로 보았지만, 실은 0과 1일 여러분의 답변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놀랍게도 피사체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그런 류의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귀찮은 설문에 응답하지 않으셨겠지. 몇 달 전의 답변이 지난 두어 달의 침체기를 허우적대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이에게 닿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응답해주신 분들은 반드시 다음에 나를 만날 때 생색을 내 주시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는 '방대한 음악적 취향 스펙트럼을 가진 자' 이기도 하면서 '저녁 11시 이후에 회사 문을 닫지 않은 것 같다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소심한 자'이고, '심심하다고 하지만 정작 안온한 일상을 벗어날 생각은 별로 없는 사람'이기도 한 나의 20년 후는 모두가 꽤나 다르게 예측했다는 게 매우 재미있었다. 나중에 추억팔이 할 예정이니 모두가 그 때에도 결과를 부디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

 

이미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도취한 2021년 구정 연휴에, 사랑을 담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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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7단계의 마지막은 이렇다. 'I AM YOU'.

 

아마도 처음에는 누군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사랑의 7단계' 에서는 심플한 영어 문장 일곱 가지로 사랑을 표현한다. I ____ YOU 형태에서 간단하게 바뀌는 영단어만 적어 보자면, Miss / Think / Like / Love / Want / Need/ Am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통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단어 Love는 7단계의 중간 지점에 불과하다. (쓰다 보니 의아하다. 왜 그리움이 사랑의 첫 단계가 되었을까. 그냥 어느 순간 그리고, 생각하다가 좋아하게 되는 걸 말하고자 했던 걸까?) 어쨌건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필요로 하다 보면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그 끝은 있기는 할까.

 

나는 호불호가 뚜렷한 편이어서, 싫다고 결론 내린 것에 대해서는 깊은 접근을 하지 않는다. 이미 좋고 싫음을 판단할 때에 웬만한 생각을 다 마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세상에는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들이 많고, 이게 왜 좋아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사고를 촘촘하게 하는 게 더 즐겁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깨달음'을 타고난 건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고, 속칭 '마플'이라고 불리는 부정적인 기류가 내게는 단기적, 장기적으로도 꽤 악영향을 미친다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전에는 어떤 감정이든 다 쏟아내야만 속이 후련해졌다면- 이제는 좋고 예쁜 것들에 대한 얘기는 하나라도 더 남기고, 부정적인 건 어느 순간에라도 적당히 쓸려 내려갈 수 있게끔 놓아주려고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속이 울렁거린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가 가끔 눈에 들어오면 끔찍하고, 매해 다가오는 (이제는 근 10년은 지나버린) 수능 철이 되면 유독 더 쌀쌀해지는 날씨도 신경 쓰인다. 흔히들 이런 걸 '공감성 수치가 높아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 나는 퍽 그런 편이다. 내 얘기를 할 때에는 물론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리액션이 풍부해지는 건 아마 그 반증이 아닐까. 나는 내 상황에 대해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려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들을 때에도 쉽사리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한때는 무슨 공모전에 도전하겠답시고 외쳐 놓고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글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참 어려웠다. 물론 지금도 어렵다. 문학 작품이라면 어쨌든 벌어져야만 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에 쓰는 내가 더 깊게 빠져드는 탓이었다. 이게 글쟁이로 밥 벌어먹고 살 만큼의 소질이 있는 건지, 그저 취미로 머물러야 하는 건지도 가끔 헷갈렸다. 이제는 '글 쓰는 걸 좋아한다'라는 크고 큰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말하기는 한다.

 

가끔 삶이 버거우면 내 인생조차도 감당하기 벅차서, 타인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따윈 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도 상세하게 사람 대부분의 인생들이 공유되는 시기라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한 움큼 손에 쥐고는 괴로웠던 적도 왕왕 있다. 적당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들의 극적인 순간에 순식간에 몰입해서는 과열된 감정을 쏟아내는 일이 가끔 버겁다. 한참을 지나버린 과거의 나쁜 기억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 세상에는 절대 없을 것이 분명한 펜시브라도 가진 양 순식간에 그 기억 속에 빠져드는 일 또한 어렵다. (롤링 여사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잦은 설정 충돌에 일개 독자는 꽤 많이 실망했었지만.. 여전히 그 세계관을 사랑하기도 하니까.) 오늘도 일하다가 갑자기 인쇄소 입장에서 고민하다 일을 키우곤 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향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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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버스를 운전하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겠지만, 누군가에게 운전대를 내어줘선 안 돼.

 

버스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세 공간 중 하나다. 집, 사무실 다음으로. 나는 하루에 두 시간쯤을 출,퇴근길 번잡한 버스에서 보낸다. 운전 면허는 있지만 차를 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운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서다. 편안하고 사적인 공간에 머무르며 대중교통보다는 더 빠르고 간결한 경로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음에도, 운전이라는 행위 자체가 내게 주는 스트레스가 더 강렬한 탓이다. 나는 내 운동신경도 믿지 못하고- 더군다나 혼자만 잘 한다고 해서 도로 위의 그 복잡한 사정들이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기도 한 이유다. 비슷한 이유로 택시 타는 걸 불편해하는데, 남의 사적 영역에 끼어들어 (실상 나보다는 훨씬 전문가일) 기사님들의 운전에 이런저런 싫은소리를 속으로만 보태는 일이 꽤 잦은 탓이다. (그래도 지금은 출장가는 날 새벽에 택시를 타고 공허한 도로를 달리는 게 퍽 익숙해졌다.) 이런 나에게 버스는, 거의 예측 가능한 시간에 목적지를 오갈 수 있게 해주는 괜찮은 교통 수단이다. 아직 내가 사는 동네는 도보 혹은 버스로 웬만한 상황들이 다 해결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버스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 중 항상 제일 처음으로 떠오르는 건 하나다. 직접 들었던 건 아니지만, 김동률 아저씨가 라디오를 할 때의 이야기였는데- 딱 6개월을 하고는, 이 라디오라는 게 너무 행복한 나머지 본인의 '창작의 영감'을 잃어버릴 것 같다며 한 이야기였다. "버스를 탔을 때, 이 자리가 너무 안락하고 좋아서 종점까지 앉아서 갈 수는 없지 않겠냐" 라는. 타고 내릴 때를 정확하게 아는 게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대중교통의 본질을 꿰뚫은 이야기였다고 할까. 출근길에 우연히 만난 한적한 버스가 아무리 반갑더라도 정작 내 목적지인 회사로 데려다 주는 노선이 아니라면 타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얘기를 하다 문득 떠오른 건데, 출근하던 어느 하루에 버스 옆구리에 적힌 목적지를 잘못 읽어서 -그러니까 엉뚱한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얘기다- 10분이면 도착할 곳을 버스를 다시 환승하고, 택시를 타서야 겨우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출근길이었는데, 이와중에 그 한적한 버스 라디오에서 나오던 건 김동률의 '출발'이었다는 게 웃음 포인트였다. 정말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말았으니.

 

언젠가부터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린 웹소설을 보는 중에도 최근 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만났다. 각 캐릭터의 개성, 매력이 뚜렷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글에서 사람을 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다정해서 가끔 울컥하는 '로즈빈' 님의 글 <찐한 고백>. 여주인공은 평범을 넘어 이상적인 가정에서, 끈끈한 가족애로 똘똘 뭉친 부모님과 함께 살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인간관계로 때로는 상처를 받고 힘겨워하는 딸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이 있었다. "삶은 큰 버스를 운전하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겠지. 하지만 네 삶을 운전하는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면 안 돼".

 

지금 나는 하나의 노선도를 만드는 버스 운전사 같다. 물론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은 있었지만, 갑자기 방향을 틀기도 했고 어느 한 동네를 돌고 돌기도 했다. 어느 곳에 멈추었는지, 어느 승객을 얼마나 태우고 그들이 내 운행경로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또한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닐까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종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는 것. 혹여 지금까지 믿고 나아갔던 방향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나갈 수 있는 용기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지 않고, 어찌되었건 나와 닿아있어 내 버스에 영혼 한 조각을 실었을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그렇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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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에서 나의 중심을 찾기 위한 길을 묻다.

 

8월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보장해주는 몇 안되는 복지혜택 중 하나인 휴가비 조금과 평일 3일, 주말까지 하면 총 5일이며 날짜도 어느 정도 고정적인 휴가가 있는 달이다. 첫 입사했던 해에 3개월만에 맞이한 휴가는 서울에서 호텔까지는 아닌 어느 숙소들에 머무르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휴가를 다녀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여동생을 동반해 싱가포르에 다녀오겠다며 다음 해 휴가 기간에 맞춰 항공편 예약을 했다. 근 10개월 정도 차근차근 준비했던 휴가는 생각보다 고된 일정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 때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 길었는지, 그 다음 해 휴가를 준비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이래저래 시간이 흐르다가 겨울이 되고, 전세계적인 펜데믹 현상을 마주하고 나니 전형적인 휴가 계획 같은 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휴가뿐만 아니라 많은 일상들조차 ‘인류의 대 위기’ 앞에선 한낱 먼지같이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몇 달동안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몇몇 중요한 일들을 놓치거나 잃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작금의 이 사태에 대해 끝내 부정적일 수는 없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무엇이든 변할 수 있고 변해버리는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을(실은 변할 수 없는) 한 가지를 역설적이게도 이 ‘위기’ 때문에 얻게 되었으니까.

방학이 존재하지 않아 슬픈 ‘학생이 아닌’ 생활을 한 지도 어언 몇 년, 가뭄의 단비처럼 생긴 얼마간의 휴가에 뭘 할지는 미리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 (계획 없이 정작 그 한가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되면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침대에 타서 방 한 가운데를 부유할 테니까. 뭐, 하루쯤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올해는 꼭 노트북을 사야지, 외장하드 자료들도 정리 한 번 해야지, 신청해뒀던 <라이프 컨셉 워크숍> 강의도 들어야지, tv에 나왔던 라임이 잔뜩 들어간 냉모밀도 곤약면으로 꼭 해 먹어야지, 은행에 가서 청년형 주택청약도 들어야지.. 일단 할 일들을 쭉 나열해놓고 나니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계간지 마감도 해야 하잖아..?

지금 하는 일의 특성상 몇 달짜리 프로젝트 단위로 굴러가는 회사 일과는 다르게, 꾸준하게 긴 호흡으로 해나갈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삶을 환기시키기에 좋은 방법이다. 한두 달은 그저 아무렇게 살다가도, 문득 계간지를 마감할 때가 다가오면 마음이 바빠진다. 이번 계절엔 어떻게 살았지, 어떤 일이 있었지, 무슨 생각을 많이 했지.. 되짚어보다 보면 ‘마냥 좋지도’, ‘싫기만 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색들로 지나온 시간들이 보여서 좋다. 계절마다 글 몇 편씩 쓰고, 가계부 정리도 3개월 단위로 한다. 크게 지출하는 항목들이나 금액이 달라지지는 않는데 자잘하게 어디에 돈을 많이 썼는지 확인하려면 이 방법이 좋았다. 아직 금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큰 사고를 치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고민하다가 이번 주제는 '여름'으로 두기로 했다. 마음 가는 대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적었더니 여름에 대한 두세 편의 글이 나온 덕이다. 하지만 그 안의 온도차는 사뭇 심각해서- 꼭 제시하는 순서대로 글을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여름을 매우 싫어하지만, 모든 여름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 이번 (9월에 나오는) 8월호의 요약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발행일이 미뤄진 건 '한 회에 세 편'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얄팍한 변명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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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늘상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조차 힘겨워진다.

 

꼭지 이름인 'Summer Hate'에서 보이듯, 어느 유행가 제목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여름을 끔찍히도 싫어한다. A or B의 극단적인 선택지를 주는 양자택일형 문제는 참 어렵지만 여름과 겨울을 두고 묻는다면 나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겨울을 외치는 사람이다. 기온이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하면 '인간의 체구성 성분은 단백질이다'라는 자명한 명제를 굳이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온 몸의 신체 기능이 뚝뚝 떨어지는 게 실감난다. 지금은 그래도 식단조절을 하면서 좀 덜해졌지만 피부질환으로 시작해서,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도 않고, 가뭄에 콩 나듯 뭔가 하려고 하는 의지가 오를 때면 이번엔 뇌가 과부하에 걸린 듯 멍하고 사고는 굼뜨게만 흘러간다. 에어컨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크림과 짧은 정기휴가로는 차마 해결되지 않는 잠시 차고 오래도록 뜨거운 여름.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평소처럼 일어나고 잠들려 해도 뭔가 게을러진 인상을 받는다. 아직도 밖은 환한데 나는 뭔가를 더 해낼 여력이 없고, 무엇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계절. 이건 한여름의 이야기고, 장마철이거나 태풍이 불거나 하면 온종일 따스한 햇살 하나 손에 쥐기도 어려워 마음이 저 멀리 보이는 물이 한껏 불어나 수면이 넘실거리는 강 어디쯤으로 가라앉곤 한다. 어쩔 수 없는 외출을 택한 다음에는 바깥의 숨막히는 습도에 짓눌리는 기분으로 겨우 한 걸음씩 내딛게 된다. 머리고 옷이고 소품이고 그 어느 것도 내 의사보다 날씨 위주로 집어들고.. 특히 올해는 늘상 마스크 아래 있어야 하는 데다, 끝없이 쏟아붓는 장마의 연속이었다가도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꿔 마음의 준비 없이 한여름을 맞이했더니 더 지독한 기분이다.

사람의 인생을 1년의 시간으로 비유하자면 나는 어디쯤일까, 아마 어느 봄날일까. 봄에서 여름에 걸친 초여름쯤 될까. 사람에 따라서는 비관적이고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비유조차도 사실 내게는 퍽 즐겁다. 열심히 뭔가 하지만 성과가 잘 보이지 않는 봄과 여름을 지나서 수확을 하는 가을과 휴식기를 갖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문득 생각해 보니, 나는 "얼른 마흔쯤 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적도 있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지레 겁먹는 또래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이었는데, 어찌 보면 노력하기는 싫고 결과는 날로 먹겠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의 반증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이유가 그랬으니까. 고민하기도 치열하기도 피곤하니까 얼른 뭐라도 좀 결정된 삶이 되었으면, 하는 것.

말로는 참 쉽다. 언제 다시 시작하기에도 늦지 않고, 지난 몇 년간을 어떻게 살아 왔건 앞으로 더 남은 시간이 많으니 많은 것을 배운 셈 치고 다시 시작하라느니, 세계적인 디자이너 누구는 마흔 몇 살에 처음 매장을 차렸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지금 나의 상황이나 고민들이 아주 하찮아 보일 테다. 매일 아침 무엇을 입어야 덜 더울지, 해야 할 산더미같은 일들 속 버벅이는 사고를 어떻게 정상 궤도로 돌려 놓을지, 뚝 떨어진 입맛과 의욕을 잠시라도 돌려놓을 방법은 없을지.. 일 년 평균치 고민들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여름이라는 계절을 아껴줄 이유는 안타깝게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마주해야만 한다면, 조금은 더 슬기롭게 나고 싶다. 가을과 겨울을 위해서는 이 여름 속에서 잘 생존해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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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니, 모든 '여름'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이번 달의 꼭지들은 꼭 순서대로 읽기를 권해야겠다. 1번 꼭지에서는 "여름이 매우 싫다"고 외치던 자가, 돌연 "아, 좋아한 것도 있었네!"를 외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문자 그대로다. 나는 정말이지, 없는 줄 알았는데, 볼 때마다 아끼고 사랑했던 무려 "한여름"이 있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직감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건 당연히 그 지긋지긋하고 치열한 더위뿐인 일 년 중 어느 시기가 아니라 사람, 다시 말하면 어느 드라마 속 인물의 이야기다.

나의 <인생작> 목록에는 몇몇 작품이 있다. 이 글을 읽을 정도의 분들이면 아마 다 알다 못해 신물이 날 지경이겠지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소개해보자면- 내 고3을 치열하게 불태워준 BBC 영드 <셜록> 시리즈나, 텍스트의 감동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극장으로 가게 만들어 준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 몇 번을 극장에서 봐서 대사며 노래며 다 외워버렸던 적도 있었던 영화 <맘마미아!>나.. 최근에는 드라마나 영화 작품보다는 뮤지컬 장르의 작품들 위주로 추가되긴 했지만. 강렬한 자극과 추리, 심리전, 기타 등등.. 피 튀는 건 못 보지만 서늘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물론 그 리스트에는 아주 심각한 것만 담기진 않는다. 이를테면 <연애의 발견>. 해맑고 사랑스럽지만 치열하게 인생을 견뎌 온 주인공 한여름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도 분명히 있다.

출연했던 배우 하나하나가 다 (심각하게는) 미운털이 없고, 설득력도 있고 나름 사랑스럽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봐도 이 작품은 꽤나 완전하게 그런 느낌이다. 그건 내가 이 작품에 나오는 배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닌 이 작품 자체를 사랑하는 식으로 완벽하게 콩깍지가 씌워져 있기 때문일 거다. 장면 하나 하나, 대사 한 마디, 중간에 깔리는 멜로디 한 줄.. 꽤 예전 작품인데, 어째서인지 그 시간만큼 촌스럽지도 않다. 아마 그 때와 지금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을 테니. 이 작품 속 한여름이 마냥 밝지만도, 당차지만도, 씩씩하지만도 않아서 좋았다. 물론 과거에 무모했던 시절도 있었고 현재에도 드라마 여주인공이 될 정도로 충분히 무모하지만.. 어떻게 보면 변덕이 심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 모습들조차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배우는 참 표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결국 시청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니 거대한 칭찬이겠지?)

이와 다른 의미로 인생 캐릭터인 '우리 해영이'는 이 인물의 모든 행동을 다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이 답답하고 버거워서 "나는 왜 이것밖에 할 수 없을까" 싶을 때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사람이다. 아주 아주 솔직하고, 어떤 순간에도 치열한 사람. 그래서 되려 해영이보다는, 어쩌면 지지부진하게 과거를 놓지 못하는 인물인 남주를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했던 것 같다. (엇, 그러고 보니 두 작품 모두 남자 주인공이 같은 배우네. 이렇게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작품 잘 고르신다.) 그런 나를 자극하고 바뀌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 해영이는.

여기저기 소중한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그들이 내 삶 한 구석에 어떻게든 녹아들어가고, 그걸 무심결에 깨달을 때는 새삼 쌓인 것들의 무게감을 실감한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과거의 취향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나는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간다. 갈수록 더 신중하게 '소중한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 무의식에 아주 깊게 뿌리를 내린다. 부디 앞으로의 내가 쓸데없는 걸로 마음 상하지는 않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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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을 놓지 못하는 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일까.

 

결국 올 여름의 계간지는 꼭지 두 개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걸까, 를 조금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삶에 이리저리 치여 8월에 발행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9월까지 무더운 여름 더위가 계속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하게 일교차는 심각해지고 슬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드는 손길이 멈칫거리는 시기. 가을인 건가?

지금 보니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한 것 같지만, 나는 수은주가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언제나 찬성인 사람이다. 이미 여름이 지독하게 싫다는 이번 달의 Summer Hate 꼭지를 읽고 오셨다면 다행히도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런 더위와 추위를 오가는 어정쩡한 날씨 말고 두꺼운 니트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추위. 사무실에서 온풍기 바람에 고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날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 때때로 차가운 커피도 마시지만 따뜻한 라떼의 온도가 유독 반가워지는 정도의 서늘함. 바람에 팔랑거리며 날리지 않아도 적당히 흔들릴 수 있는 톡톡한 두께감의 옷자락. 사무실에 두기 곤란해서 매일 입지는 않지만 몇 번의 출근길을 즐겁게 해주는 트렌치 코트. 늘어놓으려면 끝도 없을 것 같은 게, 온갖 것들이 조금은 더 반갑게 다가오는 계절이긴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보통 이들이 가장 좋은 시절을 '어느 봄날'로 묘사하는 걸 보면- 가을은 그 특유의 쓸쓸함이 밑바닥에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는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는 것도 봄이고, 봄에는 역시 특유의 설렘이 깔린 걸까. 마치 살랑이는 봄바람에 흩날려 거리를 하얗게 바꾸는 벚꽃잎처럼. 좋아하는 가을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봄날 얘기를 하게 되는 건, 올해 봄은 뭔가 특별하게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들어서다. 어느덧 2020이라는 숫자를 만날 일이 없어지는 날이 다가오면서 새삼 감상에 젖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느 봄날을 꼽자면 몇 번은 올해 봄을 돌이켜 보지 않을까 한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로라도 행복함을 느낀다면 나는 더 자주,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까. 이따금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행복을 만나면, 나는 그 행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느낀다. 어차피 이거보단 불행해질 텐데. 이걸 오래도록 오롯이 기억하면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불행하게 지내지 않을까 싶어서. (하여튼 어느 교수님이 말했던 것처럼, "그만 재야 하는" 인간답다) 슬슬 흐릿하게 행복에서 멀어져가는 기분이 들 때면 내가 조금 더 약해진 것 같아서 가끔은 슬프다. 나는 이 행복을 경험하기 전보다 더 나약해지지 않았을까. 더 쉽게 괴로워하고, 더 쉽게 포기하는 인간이 된 건 아닐까.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 행복은 내 안의 큰 자양분으로 자리해서 나를 든든하게 만드는 '뒷배'가 된다. 언젠가는 이렇게 행복했으니, 또 다시 언젠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고, 좋은 일이 있고 난 직후는 당연히 엄청 쓰지. 예전에 비해선 좀 덜 좌절하고 더 쉽게 일어나는 것 같은데- 실은 아직도 어리고 서투르기만 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런 모습의 나를 마주하는 것조차 반갑다.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딘 어른이 되어 가면서도 내 안의 아이같은 구석은 지켜내야, 그래야 내가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더라, 아.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어느덧 가을이 찾아들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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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은 지워지지 않는다.

 

12월에 기획했던 아이템을 날리고, 회사일이 바쁘고.. 와 같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1월에 약속했던 계간지 발행을 미뤘다.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상태의 첫 발행 연기. 소소한 글들을 읽어주는 분들에게도, 약속했었던 나 자신에게도 참 미안한 마음이 드는 첫 겨울 계간지였던 어느 날의 서문이다.

 

직무 특성 상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매일같이 들여다 보는 편이다. 가장 열심히 들여다 보는 취미 실용 분야에는 신간이 자주 등록되진 않아서, 때로는 며칠 간 매번 같은 내용의 화면을 마주하다 사이트 메인 페이지로 돌아가곤 한다. 사실 메인 페이지조차 엄청나게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그 화면을 들여다보는 내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 같다.

 

오늘 이 서문을 적는 순간에는 '글 쓰는 여자는 지워지지 않는다'라는, 어떤 서적의 서브 카피가 눈에 띄었다. 이 또한 맞는 말이기는 하겠지만, 조금 단어를 수정해 서문의 첫 줄에 적어 보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구체화한다면, '지울 수 없다' 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도, 당장 나 자신도 이 순간을 어떤 글로 적어두고 나면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세 편의 계간지가 그랬고, 그 전에 적었던 수많은 글들 또한 그렇다.

 

글을 쓴다는 행위에 불만은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시키지도,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 글을 굳이 골머리 싸매며 적고 있는 것일 테지만. 글을 적다 보면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생각을 의식 밑에서 끄집어 내어 보게 되기도 한다. 그 생각들은 나의 현재 고민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고, 어쩔 때에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내 안의 추악한 괴물'일 때도 있다. 말을 할 때와 글을 쓸 때의 차이라고 한다면 수십, 수백 번을 곱씹고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가장 적확한 표현과 명료한 문장으로 나타내고자 노력한다는 점일 거다. 그래서 지난 어느 순간에 '박제'된 글을 마주하다 보면 그 적나라함에 당황하기 일쑤다. (감정이 되었건, 글을 못 쓰는 실력이 되었건간에 참 많은 것들이 민낯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때로는 글로 적지 않고, 말로 소리내어 만들지 않고 넘겨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감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주 위로가 되지 않을지언정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힘들었던 몇몇 나날이 존재한다는 걸 아니까. 그럼 굳이 나는 이걸 곱씹으면서 적으면서 별거 아니었던 난관을 아주 별거처럼 내 역사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결국 내 안에 쌓인 무언가들은 말로든 글로든 내어놓아야지만 시간의 풍화를 맞을 수 있다고.

 

이번 계절과 기록 없이 지나버린 계절에는 아직 오지 못한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 대부분은 회복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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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펑 터지는 게, 딱 풍선을 닮았다.

 

이건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이야기다. 찰랑이는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해 글로 쏟아내려 하는 지금에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이 꼭지가 발행될 수 있을지. 나는, 내 손으로 이걸 어느 때 어느 계절의 기록이랍시고 내어 놓을 수 있을지.

 

그래. 이 사태는 모두 한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중국 우한, 한국의 어느 사이비 종교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원인이 명료한 것과 별개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 벌어진 많은 일들에는 대체 무엇을 탓하고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당장 아주 즐거운(아마 다녀왔다면 즐거웠을) 2주간의 휴가를 잃었고, 두 번의 뮤지컬 관람 기회와 7년을 기다려 온 공연 하나, 연락은 이어왔지만 아주 오랜만이었던 친구와의 재회를(이건 미뤄진 거지만, 어쨌든 이번 겨울에는) 잃었다. 비용이 발생한 숙소나 기차 예약 위약금은 다음 문제다. 나는 내가 손꼽아 기다려오던 것들을 서서히 급격하게 잃어갔다. 그리고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상처받았다.

 

이 모든 걸 나 혼자 잃지는 않았을 텐데도, 누군가는 더 큰 걸 잃었을 거고 더 큰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음에도, 이걸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심리적인 타격은 무거웠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몇 차례의 실언과 기타 등등의 혼란을 겪으면서 나는 아주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다. 그래야 이 모든 게 지나고 난 다음에 후회를 덜 하겠지 싶어서. 상황과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처받았으니 사과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던가, 가지 못한다면 굳이 쥐고 있지 않아도 될 표를 취소한다던가, 시시각각 상황을 지켜보며 온 날을 곤두세웠다. 아마 나중에는 이게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할 거다. 굳이 시끄럽게 가족과의 분쟁을 만들지 않았고, 쓸데없는 소모전을 최소화했고, 제 때 취소해서 돌려받은 돈들을 어딘가에 쓰면서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당장 지금은 벅차니까.

 

이번 주에는 내내 다른 이유로 울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음에도, 참고 삼켜내는 것보다 그냥 흘러가도록 두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이렇게 천재지변과 같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돌아보면 나는 나를 많이 괴롭히는 것 같다. 내가 조금만 더 미쳐있었다면, 이런 '개인 위생과 면역력에 의존하는' 질병 따위는 겁내지 않을 정도로 용감했더라면, 조금만 더 가족의 쓴소리를 듣고 흘릴 수 있었다면, 아니 그전에 이미 독립을 했었더라면? 온갖 이유들로 나를 몰아세웠었다. 그 중에 가장 원망스러웠던 부분은 단연 왜 이렇게도 사서 기대해서, '팔자에도 없는' 일들을 끊임없이 벌여나가면서 고작 이것 한두 가지 되지 않았다고 이렇게나 실망할 일이었는지.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펑- 터져 조각 조각으로 허공을 부유하는지(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았을 걸.). 분명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되뇌이면서 보내왔던 지난 몇 달이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지. 결국 나도 과거의 과오를 답습하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이었던 것인지..

 

어쨌든 4일 만에 대충 다 심리적 회복은 한 것 같았는데, 이렇다고 느끼자마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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